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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리뷰

세계사의 구조 - 가라타니 고진 (2)

 

관료제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거대한 토목사업에서 관료제가 발달한 것은 분명한데,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공사에 종사하는 인간들이 어디에서 왔고, 또 그들을 관리하는 관료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다. 씨족사회의 사람들은 종속적 농민이 되는 것을 혐오한다. 유목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배자가 되어도 관료가 되는 것을 싫어하며 전사=농민으로 남으려고 한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관료제가 전혀 발달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일례다. 로마에는 관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인에게 조세징수를 청부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발적으로 관료가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경제적 형태의 분석은 현미경도 화학적 시약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추상력이라는 것이 이 양자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전노와 달리 상인자본은 화폐→상품→화폐+α(M-C-M'(M+ΔM)라는 과정을 통해 화폐의 자기증식(축적)을 꾀하는 것이다.


‘이런 절대적 치부충동, 이 격정적인 가치에의 추구는 자본가와 화폐퇴장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하지만 화폐퇴장자가 단지 미친 자본가인 데에 반해,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퇴장자이다. 화폐퇴장자가 얻으려고 노력하는 가치의 쉼 없는 증대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보다 총명한 자본가는 그것을 항상 유통에 지속적으로 투하함으로써 달성한다.’

 

시계=제국에서는 부의 축적=수탈이 폭력적인 강제와 안도감이라는 교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그것은 교환양식B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세계=경제에서 부의 축적=수탈이 상품교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그것은 교환양식C에 기초하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런 시스템은 그때까지의 세계시스템을 급격히 변화시켜 갔다.

 

주권으로서 국가의 본질은 국가의 내부에서 보는 한 보이지 않지만, 전쟁에서 현재화된다. 그러므로 칼 슈미트는 주권자를 ‘예외상태’에서 보려고 했다. 왜 전쟁에서 국가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보다도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와 같은 대외적인 면에서 내부에서 보이는 것과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시민혁명 이후 주류가 된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국가의 의지란 국민의 의지이고, 그것은 선거를 통해서 정부에 의해 대행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국가는 정부와 다른 것이며, 국민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전쟁과 같은 예외상황에서 노출되는 것이다.

 

일찍이 라이트 밀즈가 분석한 것처럼 화이트칼라는 사기업의 관료층이다. 선진자볹의국가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역할이 크다. 그들은 화폐와 상품이라는 경제적 카테고리에 근거한 계급으로 말하자면, 프로레타리아지만, 실제로는 블루칼라를 지배하는 신분에 있다. 화이트칼라의 고뇌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와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또 들어가면 자신의 의사를 희생하여 조직의 톱니바퀴로 일하고, 위계를 올리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즉 이것은 임금노동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료제에 특징적인 문제다.

 

학교교육은 직인의 도제제 훈련과는 다르다.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상품에는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어떤 직종으로 이동해도 적응가능한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계산능력이나 언어능력과 같은 일반적인 지식을 부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게다가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은 기술혁신(생산성의 향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노동만이 아니라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불가결하다. 이와 같은 과제를 완수하는 것은 개발자본이 아니라 총자본 즉, 현실적으로 국가이다.

 

자본주의경제는 ‘신용’으로 이루어지는 체계이다. 그리고 신용이란 상품교환의 곤란을 일단 초월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신용이 돌연 붕괴될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지만 신용의 ‘위기’를 우발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상품교환인데, 그것이 노동력상품이다. 왜냐하면 토지나 화폐.자본의 상품화에 관해서는 시장의 ‘자기조정적 시스템
이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일단 기능을 하지만, 노동력상품에 관해서는 그와 같은 ‘자기조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는 칸트가 감성과 오성의 이원론을 고집했고, 낭만파가 그것을 뒤어넘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칸트는 이원성을 긍정했던 것이 아니다. 감성과 오성의 분열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른 존재방식을 현실에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자본제사회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불평등하다. 그렇다면 오성과 감성의 분열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런 분열을 상상력으로 초월하려고 할 때, 문학작품이 태어난다. 그와 같은 문학에 의한 현실초월이 ‘상상적’인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상태로부터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에서 사회주의는 내셔널리즘과 융합한다. 그것은 식민지화된 나라의 자본이 매판적.종속적이고, 사회주의자가 없으면 내셔널리즘은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부분에서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이 동일시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오히려 발달한 산업자본주의국가에서 내셔널리즘이 사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나치스의 당명(내셔널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보여주는 것처럼 내셔널한 사회주의다. 즉 네이션을 통해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적대적이다. 물론 네이션을 통해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창출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는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파시즘이 강한 매력을 가졌던 것은 그것이 모든 모순을 ‘지금 여기서’ 넘어서는 꿈-실제는 악몽이다-과 같은 세계의 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의 단계는 자본과 국가의 결합 그 자체의 변화로서 나타나는 것, 또 그것은 리니어한(linear, 직선적인) 발전이 아니라 순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는 내부에서만 지양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지양할 수 없다. 이 안티노미에 대해 마르크스는 고민하지 않았다. 사회주의혁명은 ‘주요민족들이 <일거에> 그리고 동시에 수행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